홍범도 장군은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통해 독립운동과 혁명 활동을 전개한 중요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대한민국 독립 운동사에서 큰 업적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나 자성(慈城), 양덕 등을 전전하며 어려운 생활을 겪었습니다. 그는 머슴, 건설현장 노동자, 종이공장 노동자, 사냥꾼, 광산 노동자 등으로 일하며 삶을 유지했습니다.
1895년경부터 의병에 참여하여 함경남도 갑산과 함경북도 무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에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 활동에 영향을 받아 같은 해 11월 갑산에서 산포대를 조직하여 의병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삼수(三水)와 갑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이다가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의 양성에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부인과 아들 모두를 잃게 되었습니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홍범도 장군은 망명하여 만주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습니다. 1919년 간도 국민회의 대한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와 일본군을 공격하는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후 독립군의 통합 운동을 주도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고,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1920년 일본군이 봉오동(奉午洞)을 공격할 때 홍범도 장군은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의 일본군 병사를 사살하는 등 크게 기록되는 전적을 올렸으며, 청산리 대첩에서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협력하여 일본군에 대항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을 겪은 후에 가족들이 모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한반도로 돌아오지 않고, 연해주에 머물렀습니다. 그 이후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공산당(코민테른) 국제대회에 참석하여 원동(遠東)의 식민지와 반식민지 혁명가로서 활동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고려인과 일본인을 닮았다는 이유로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키질로르다로 옮겨와 거기서 집단 농장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말년에는 고려극장의 관리인으로 일하면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1943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그의 유해는 키질로르다의 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2021년 8월 15일 대한민국으로 유해가 송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다시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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